배설이라는 인물을 판단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물론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는 원균의 명령에 불복종하면서 최소한의 수군 병력을 지켜냈으며, 한산도 통제영에 있던 막대한 군사물자가 왜군의 손에 넘어가는 것도 막아냈습니다. 전란 직후 처형됐으나 6년 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증되면서 사면ㆍ복권되었습니다. 나름대로 억울했으며 군인으로서 노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한산도대첩 : 세계 해전사史의 별이 되다 

앞서 명량해전을 언급할 때, 이순신의 전투 방식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순신의 전투 방식은 철저한 정보 수집을 거쳐 소수의 아군으로 여러 적군을 격파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아군의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 육군은 일방적인 패배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다르게 이순신의 수군은 피해조차 거의 없는 대승을 이어갔는데요. 일본군은 이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일본은 처음부터 해전을 고민하진 않았습니다. 일본 수군의 주임무는 전투가 아니라 수송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수군의 존재는 처음부터 무시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소중한 군수물자를 바다에서 전부 잃어버리면, 어떠한 군대라도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 육군이 없는 것처럼 돌격하던 왜군은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에게 완승을 거두었습니다. 용인 전투에서는 1500대 5만이라는 엄청난 차이에도 승리했습니다. 왜군은 조선군이 가소롭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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